김해 김(金)씨 삼현파(三賢派)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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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락국 시조대왕 존영 - |
- 가락국 시조황후 존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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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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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파(판도판서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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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파 ]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2개파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경파(京派 - 영견, 영서, 영정, 영순) : 고려의 김목경(牧卿)을 중시조로 한다. § 사군파(四君派 - 극조, 완, 여수, 세기) : 목경의 동생 김익경(益卿)이 중시조다. § 삼현파(三賢派 - 극일, 일손, 대유) : 김관(管)을 중시조로 한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馹孫)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 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馹孫)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이 목(李 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 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馹孫)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 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 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 고
일손(馹孫)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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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足堂 先生 神道 碑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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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時堂望景臺遺墟碑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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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인해 藏岩이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전하고 지금 四時堂 金公의 子孫들이 여기에 살고있다. 公의 諱는 생(生) 이요 字는 평원(平遠)이요 初諱는 生이니 節孝先生의 玄孫 三足堂 先生의 次子요 濯纓先生이 그 從祖父이다. 아! 戊午 己卯史禍를 어찌 참아 말하랴! 三足堂先生께서 일찍이 科居에 올라 벼슬이 正言에 이르시고 漆原에 부임했을 적에 석달만에 교화가 크게 행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명같이 우러러 보더니 급기야 벼슬을 사양하고 집에 돌아와서 요행이도 위태한 지경을 면했다! 두아들을 두었으니 성(成)과 생(生)이다 . 다함께 큰 일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었고 親喪을 당해서는 피골이 상연하도록 슬퍼하였다. 생(生)이 찬성벼슬을 지낸 이장곤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五男을 두었으니 南冥先生이 지은 '三足堂先生 神道碑文'에 실려있다. 공이 대화를 겪은 뒤로는 여기에 은거하며 수석에 취미를 붙였고 百里길을 왕복하며 아버님의 문안을 살폈다. 또, 臺와 檀을 모아 檀은 七星이라고 하고 臺는 望景이라 했으니 사실이 '墓地文'에 실려있다. 또, 臺에다 日月 龍龜 河洛圖書 八卦 井田같은 여러가지 형상을 새겼고 그 주위에는 杏, 李, 桃 나무같은 것을 많이 심었으니 이것은 어버이께 효도하고 임금님께 충성하며 성인을 사모하고 대의를 높이며 세상을 돕고 후세를 열어주어 천리와 인도를 모두 알도록 갖추었고 그 臺를 四時라 이름했으니 때와 절후에 회전함을 알린다는 뜻이다. 미리 산소자리를 잡아놓고 지문이나 臺圓을 묻어 비밀에 붙여두었으므로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지 數百年만에 세상에 드러났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고 鬼神이 守護해서 이뤄진 것이 아닌가? 이미 나라에 호소해서 臺와 檀을 수리했고 또 당세 文筆가의 글을 구해 세상에 유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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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陽 芝隱公 之墓 碑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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系出 駕洛國首露王의 後喬로 至高麗하여 版圖判書 子師文貞公 諱管은 中祖며 中祖의 玄孫 慕庵節孝 諱克一과는 七世孫 文愍公 탁영 諱 馹孫과 馹孫의 長姪 三足堂 諱 大有三人은 世稱 三賢으로 三賢은 派祖니라. 公은 三賢派祖中의 三足堂人 諱 大有의 孫으로 父生과 母 碧珍李氏의 次子로 中宗25年 庚子二月十六日에 生하여 宣朝 十四年 辛巳 八月一日卒하니 享年이 四十二世 也라 公側 自 始祖王의 五十八世孫이요 自 中祖의 十世孫이고 三賢中 三足堂의 二世며 宣朝 丙寅年에 贈 資憲大夫知敦寧府事니라. 公은 戊午史禍로 被家禍하여 流落隱遯하면서 後世代代로 辭仕遯世하며 不求聞達 하고 未釋卷 於典籍書史 하고 自慰於詠風月에 儉素生活로 利害權勢에 不撓하며 先祖遺訓으로 終身不仕하니라. 牛溪成渾을 師事하여 道義를 崇護하고 名譽權勢를 不求하고 自漆原으로 現 忠南 瑞山 大山 熊島에 寓居 하다가 終 하니라. 墓는 現 忠南 瑞山市 大山邑 熊島里 大村俗地名顧 池串 牛眼於子坐原하다 配 贈貞夫人 順興安氏는 父通政大夫에 號 文谷인 諱正祐의 女 로 中宗 三十六年 辛丑二月 二十一日에 生 하여 庚辰 三月十六日 卒하니 享年 四十世 也 며 墓는 與公合棺하다. 子 福凱 字 愼在며 號는 克齋 現十四代宗孫은 鍾潤也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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